🐸 "누구에게 사랑을 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2023. 6. 8.

020 | 🐸 "누구에게 사랑을 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POV: Point of View의 준말로서, 시각, 관점, 견해를 뜻합니다. Point of View(포인트 오브 뷰)는 관객의 다양한 시각을 통해 영화에 대해 넓고 깊게 대화하며 각자의 취향을 구체적으로 찾고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 고민하기 위함을 목적합니다. ✍🏻 매주 목요일 발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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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감독 | 폴 토마스 앤더슨 Paul Thomas Anderson

2023. 06. 08.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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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V :

🐸 "누구에게 사랑을 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매그놀리아>(폴 토마스 앤더슨, 1999)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는 연관성 없어 보이는 일련의 인물들이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교차하고 중첩되며 진행됩니다. 이러한 극 진행 방식은 단순히 줄거리의 장치로서만 활용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것 같은 결정론적인 주제의 상징으로 활용되는데요. 즉 <매그놀리아>는 인간의 주체성과 결정론 사이의 경계선을 파헤치며, 인간의 자유 의지는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얼마나 쉽게 변질되고 무너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나약함 속에서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질문하는 듯합니다.

<매그놀리아>의 플롯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여러 개의 내러티브를 각각 캐릭터의 사건과 엮어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조에 맞지 않는 관계의 그물을 형성하는데요. 이러한 관계는 이전 뉴스레터 2호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2004)를 소개하며 설명했던 철학자 질 들뢰즈의 리좀(Rhizome) 개념과 닮아있습니다. 영화 속 인물은 고립된 개인으로서가 아닌 상호 연결된 복잡한 웹의 노드로써 작용하는 듯 보이는데요. 인물들의 우울한 감정은 이러한 관계 속에서 공유되고 전이되며 빗물이 모여 고인 물웅덩이처럼 점점 깊어지고 무거워지는 듯 보입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 잘 알지 못하거나 만나지도 않았지만 모두 LA에 살며 초반 '부분적으로 흐림. 비 내릴 가능성 82%(Partly Cloudy, 82% Chance of Rain)'이라는 다소 어두침침하고 습한 날씨를 공유합니다. 만난 적도 없으며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모두 외부로부터의 같은 영향을 체감하고 있는데요. 날씨의 변화에 따라 또 인물들의 감정이 더 많이 공유되고 전이됨에 따라, 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우울한 상황에 더 극단적으로 치닫게 됩니다.

하지만 난데없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개구리 비는 도시를 감싸고 있던 무거운 분위기를 해소시킵니다. 사실 이러한 기괴한 재난이 있었다고 해서 후에 인물들이 가진 갈등이 전부 해결되지는 않겠거니와 또 이날과 같은 우울한 하루가 반복될 수 있겠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출애굽기 8장 2절(Exodus 8:2)("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가 개구리로 너의 온 땅을 치리라")이 끊임없이 등장하듯. 절벽을 향해 달려가던 인생을 뜬금없이 구원해 줄 비 인과적 관계는 한눈에 띄진 않겠지만 항상 삶의 주변에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영원히 혐오할 것만 같던 누군가를 보고 웃으며 이 영화가 끝나듯이 말이죠. 이번 주는 <매그놀리아>에서처럼 인과관계가 없을 것 같은 우연적 사건을 통해 어떤 사건이나 감정이 해소되는, 또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지금껏 일어난 모든 사건을 설명하는 것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는지 혹은 그러한 내러티브를 가진 영화는 뭐가 있는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아래에 매그놀리아 오프닝 곡을 첨부해놨으니 이번 호 같이 들으면서 읽어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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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비아

트리비아: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숨겨진 이야기나 여러 방면에 걸친 사소한 지식

1)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하 'PTA')이 조지 C. 스콧 배우에게 얼 패트리지 역을 제안하러 갔을 때, 스콧은 대본을 방에 던지며 "내가 봤던 대본 중 최악이야. 언어가 형편없어."라고 말했다.

2) 건물에서 떨어지다 총에 맞아 사망한 남성에 대한 이야기는 수년 전부터 형법 수업에서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 가상의 사례로 자주 인용되었다.

3) 제이슨 로바즈의 마지막 장편 영화다.

4) PTA는 윌리엄 H. 머시 배우의 오두막집에 지내며 2주 동안 대본의 대부분을 써냈다. 그는 밖을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밖에 나가다 뱀을 보았기 때문이다.

5) 클라우디아는 대본에서 최초로 창조된 캐릭터였고, 다른 캐릭터들은 그녀로부터 갈라져 나왔다.

6) PTA는 각본의 영감을 대부분 에이미 만의 음악에서 받았는데, 때문에 에이미 만의 가사가 대사로 활용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Deathly' 노래에는 "Now that I've met you / Would you object to / Never seeing / Each other again"이란 가사가 나오는데, 이 가사는 영화에 "Now that I've met you, would you object to never seeing me again?" 대사로 인용된다.

7) PTA는 톰 크루즈에게 프랭크 T.J. 맥키 역을 제안하기 위해 <아이즈 와이드 셧>(1999) 촬영장에 방문했다.

8) 거의 모든 장소에 적어도 한 장의 목련 사진이나 그림이 있다.

9) 제목인 매그놀리아는 목련을 뜻하는데, 감독도 별생각 없이 지은 제목이라고 한다. 게다가 영화 내에서도 실제 목력이 아니라 거리 이름으로 나온다. 실제로 캘리포니아에 가면 매그놀리아 거리가 있는데 거기서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깊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감독이 몇 번 지나다녔던 거리인데 거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10) New Line Cinema 제작사는 이 영화를 톰 크루즈 영화로 홍보하고 싶었지만 PTA는 이 영화가 앙상블 작품이라며 거절했다. 결국 그는 포스터와 예고편을 직접 편집했습니다.

11) 존 C. 라일리는 심각한 연기만 하는 것이 싫증 나 PTA에게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부분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12) 출애굽기 8장 2절("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가 개구리로 너의 온 땅을 치리라")은 영화 내내 백 번 이상 언급된다.

⚠️ 스포일러

13)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임종 장면에서 프랭크(톰 크루즈)의 "I am not gonna cry for you" 대사 이후 모든 연기는 즉흥이라고 밝혔다. 크루즈는 대본보다는 직접 자신의 아버지를 죽었을 때를 생각하고 그것이 이끄는 대로 연기하겠다고 말했다. 다음 촬영에서 크루즈는 울음을 터뜨렸고, 영화에 나오는 장면이 그 모습이다. 호프먼은 프랭크가 흐느끼는 것에 대한 필(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반응은 실제 반응이라고 말했는데, 그는 크루즈가 그렇게 연기할 줄 몰랐고 크루즈의 순수함을 느꼈기 때문이라 밝혔다.

14) 개구리 비 장면에 사용하기 위해 7,900마리 이상의 고무 개구리가 만들어졌다. 나머지는 CGI 처리가 됐는데, 생산 과정에서 실제 개구리가 다치는 일은 없었다.

15) 지미 게이터 역의 필립 베이커 홀은 2차 대전 중에 실제로 개구리비를 맞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스포일러는 드래그로 복사해 볼 수 있어요)

출처: IMDB

🇰🇷 국내 박스오피스 05. 29. ~ 06. 04.

1 범죄도시3

2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3 분노의 질주: 라이드 오어 다이

4 인어공주

5 포켓 몬스터 DP: 아르세우스 초극의 시공으로

🇺🇸 미국 박스오피스 05. 26. ~ 06. 01.

1 The Little Mermaid

2 Fast X

3 Guardians of the Galaxy Vol. 3

4 The Super Mario Bros. Movie

5 The Machine

🇰🇷 국내 개봉 일정

6. 6. 트랜스포머: 비스트의 서막, 스티븐 케이플 주니어

6. 14.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미야케 쇼

6. 14. 플래시, 안드레스 무시에티

6. 14. 엘리멘탈, 피터 손

🇺🇸 미국 개봉 일정

6. 9. Transformers: Rise of the Beasts

6. 9. Meding the Line, Joshua Caldwell

6. 16. The Flash, Andy Muschietti

6. 16. Elemental, Peter Sohn

* 🎬 메타스코어 🍅 토마토미터 🍿 오디언스 스코어

🔒 OTT 공개/종료 예정

넷플릭스

공개 카운트(6), 어쌔신 크리드, 빅쇼트(10), 살인마 잭의 집(12), 데어 윌 비 블러드, 겟 아웃(15)

종료 더 스파크스 브라더스, 림보, 독전(14), 먼 훗날 우리(21), 빅 피쉬, 첫 키스만 50번째,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맨 프롬 UNCLE, 아메리칸 메이드, 라이트 아웃, 레전드 오브 타잔, 더 브레이브, 컨테이젼, 미션 임파서블, 미션 임파서블 3,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 미션 임파서블: 풀아웃(30)

왓챠

공개 헤어질 결심(6), 상견니(12), 외계+인 1부(20)

종료 산다(9)

🗞️ 이주의 뉴스

인사해, 주 변호사야 👊🏻

마동석 주연의 <범죄도시3>가 개봉 7일 만에 600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개봉 11일차에 1,000만 관객을 모았던 전편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데요. 전편 <범죄도시2>는 팬데믹 이후 첫 천만 영화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 이후 3년 만에 관객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였습니다. 그동안 국내에서 개봉 7일 차에 누적 관객 수 600만을 돌파한 영화는 <명량>(2014), <부산행>(2016)이 있습니다. <범죄도시3>는 형사 마석도(마동석)가 서울 광역수사대로 이동 후, 신종 마약 범죄 사건의 배후인 주성철(이준혁)과 마약 사건에 연루된 또 다른 빌런 리키(아오키 무네타카)를 잡기 위한 내용이 담긴 장르 영화인데요. 전편보다는 아쉽다는 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불호 없이 모든 관객이 좋아할 만한 범죄도시 시리즈만이 할 수 있는 액션과 유머 요소가 앞으로도 롱런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저는 현충일에 무대인사로 관람하고 왔는데요. 직접 찍어온 배우 사진들을 아래에 첨부해놨어요. 👀)

넷플릭스 X 박찬욱 🤝🏻

넷플릭스가 영화 <전,란> 제작을 확정 짓고, 캐스팅 라인업을 공개했습니다. 강동원, 차승원, 박정민 등이 출연하고 박찬욱 감독이 제작과 각본에 참여하는데요. <전,란>은 임진왜란 시대를 배경으로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박정민)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이 선조(차승원)의 최측근 무관과 의병으로 적이 되어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지아장커, 5년 만에 복귀

<소무>(1997), <플랫폼>(2000), <스틸 라이프>(2006) 등의 대표작으로 평론가의 극찬을 받고 있는 중국 감독 지아장커가 칸 영화제에 초청되었던 <강호아녀>(2018) 작품 이후, 5년 만에 <We Shall Be All> 제목의 장편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정했어요. 아직 개봉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2001년부터 꾸준히 촬영되었으며 올해 말에 마저 촬영을 끝마칠 예정이라고 해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라인업 공개 🧠

지난 7일 부천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개•폐막작과 주요 행사 일정을 공개했습니다. 51개국의 장•단편 영화 262편이 상영되는 올해 영화제는 오는 29일부터 다음 달 9일까지 11일 동안 열릴 예정인데요. 지난 영화제처럼 부천시청 판타스틱큐브, 한국만화박물관, CGV 소풍, 메가박스 부천 스타필드시티에서 오프라인 상영을 하고 OTT 플랫폼 웨이브에서 온라인 상영을 할 예정입니다. 개막작으로는 많은 시네필들의 올해 기대작으로 뽑히는 아리 애스터 감독의 '보 이즈 어프레드'가 선정되었는데요. 오프라인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온라인 프로그램만 봐도 만족스러울 것 같다는 말이 나올 만큼 잘 선정된 영화 라인업에 많은 시네필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어요. 🔗

미야자키 하야오 은퇴작 🖐🏻

스튜디오 지브리 대부분의 작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집 토로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을 만든 장본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 다음 달 7월 14일 일본에서 개봉됩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이사 겸 프로듀서 스즈키 도시오는 지난 2일 일본 월간 분게이슌주(文藝春秋) 인터뷰에서 미야자키 감독 은퇴작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How Do You Live?)'를 홍보 마케팅 없이 개봉한다고 말했는데요. 2013년 은퇴를 선언하고 4년 만에 철회한 미야자키 감독의 신작이자 은퇴작 개봉 소식을 알린 것입니다. 현재까지 공개된 건 아래에 있는 영화 포스터뿐인데요. "예고편을 보면 영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 수 있고, 그 때문에 극장에 가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며 "이번엔 (일반적 마케팅과) 반대로 해보고 싶었다"고 덧붙였습니다.

• 웨스 앤더슨 감독의 13번째 작품이 올해 말 프랭크인 될 예정이에요. 주연은 마이클 세라로 예정되어 있어요.

• 할리 베일리가 차기작으로 여성 인권을 주제로 한 영화에 참여하게 될 예정입니다. 할리 베일리는 지난 달 자신의 SNS를 통해 영화 <The Color Purple> 예고편을 공유했는데요. <The Color Purple>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리메이크한 뮤지컬 영화로, 1983년 미국 흑인 여성 작가인 앨리스 워커가 집필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요. 워너 브라더스가 제작하는 이 영화는 블리츠 바자울레 감독이 연출하고 2023년 12월 25일 개봉 예정이에요..

🏊🏻 편집자의 디깅

이번에 소개하고 싶은 편집자의 디깅은, 1961년 생 프랑스 🇫🇷 출신 감독 로랑 캉테(Laurent Cantet)입니다. 로랑 캉테는 1999년 38살의 나이로 데뷔했습니다. 초국적 자본과 함께 세계화가 진행되며 노동 운동을 무력화시켰던 90년대 후반에 노동 문제를 다루는 장편 극영화는 세계적으로도 찾기가 힘든데요. 9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는 정치•사회 문제를 선정적일 만큼 정면으로 부각시키는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로랑 캉테는 알랭 기로디, 로베르 게디기앙과 함께 이 흐름의 대표 주자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의 대표작, <Human Resources>(1999)는 대안 계급의 가능성은 사라져버리고 사실상 '실패자'가 돼버린 노동 계급의 현실을 비춥니다. 캉테는 또한 노조 파업의 결과가 불명확한 채로 차갑게 끝내 버리는데요. 노동자의 편에 서면서도, 영국 출신 감독 켄 로치와는 달리 노동이 신성한 것이라는 격언에 연연해하지 않으며 희망을 남겨놓고 복 돋우려고 한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켄 로치와의 차이점은 <Time Out>(2001)에서 더 벌어지는데요. 주인공의 대책 없는 거짓말 행각의 이면에 직장과 가정으로부터 도피하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전의 관성을 따르려 하는 중간 부르주아의 심리를 중계하는데요. 노동•사회 문제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개인의 실존 쪽에 더 무게감을 싣습니다. 즉, 캉테가 주목한 건 구체적인 사회문제이기보다 인간과 사회라는 근원적인 요소의 함수관계입니다.

로랑 캉테는 제61회 칸 영화제에서 <The Class>(2008)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는데요. 국내에서는 볼 기회가 흔하지 않겠지만, 비슷한 주제를 공유하고 있는 켄 로치의 대표작들을 보며 노동 문제를 다루는 극영화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며 혹여나 다음에 있을 로랑 캉테 기획전을 기다려보는 건 어떨까요?

대표작: <The Class>(2008), <7 Days in Havana>(2012), <Time Out>(2001), <The Workshop>(2017), <Human Resources>(1999), <Foxfire>(2012)

참고: 씨네21

✍🏻 구독자의 대화

저희 뉴스레터에서는 매주 영화에 대한 구독자의 짤막한 감상 및 한문단평(200~500자 내외)을 기고 받아 소개하고 있습니다. 꼭 영화를 잘 알지 못한다 생각이 되어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써보거나 말해보는 연습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구독자의 영화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이 궁금합니다. 원고 많이 보내주세요. 🙂

카일리 블루스 | 비간

(⚠️ 스포일러)

'지구 최후의 밤'이 허구로 도피한 채 끝남으로써 확정적인 현실에의 결정을 희망적으로 유보하였다면, '카일리 블루스'에서의 허구는 현실에서 비롯된 단절에 저항하기에는 아직 너무나도 유약하다. 하나 희망의 이미지들은 여전히 생산되고 있으며, 필경 여기에서 '지구 최후의 밤'의 희망이 싹텄으리라.

천성은 시인이다. 그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TV에서 방영되는 그의 시 낭송은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다. 자신의 작품에 기여한 이들을 먼저 열거하는 장면은 시보다는 영화의 크레딧을 연상시킨다는 점도 기이한데, 정작 관객은 이 '크레딧' 장면을 뒤이어야 마땅할 천성의 시를 듣지 못한다. 이때 빈칸을 남기고 사라진 시구들은 영화의 장면 곳곳에 틈입하면서 하나씩 존재를 드러낸다. 개인적인 감상이야 제각기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천성의 시들은 미완성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와닿았다. 매우 다양한 심상을 유발하는 풍부한 시상들을 내포하고 있음은 확실하나, 그것들을 하나로 수렴시키는 시적 완결성이 부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따라서 그것들은 시라기보다는 아직 시의 형태에 도달하지 못한 단순한 시상의 집합과도 같다.

그렇다면 천성이 과연 완성품으로서의 시를 창조해낼 수 있을지, 그 행보를 궁금해하는 이들은 그가 영화 도처에 흩어놓은 이러한 시상들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 시상들의 원천일 수밖에 없는 천성의 일상으로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일상 속에서의 천성은 여러 종류의 상실과 결부되어 있는 처지로 그려진다. 형제와의 절연뿐만 아니라 조카인 웨이웨이와 영영 결별하게 될 위기에 당면해 있으면서도, 과거에는 이미 어머니와 아내와의 결별을 한 번씩 감내해야 했었다는 사실이 이후 영화에서도 밝혀지며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상실이란 단순히 천성만이 앓는 희귀병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는 카일리라는 고장 전체가 앓는 풍토병에 가까워 보인다. 영화는 어머니의 부재를 여전히 안고 있는 천성의 형제부터 아들을 잃은 땡추에 이르기까지 상실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들을 고루 비춘다. 이 상실의 정서가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 인물은 아무래도 노파 의사가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 친구에 관한 일화나 생매장당한 아들을 꿈꾸는 아버지의 일화를 천성과 공유하면서 마치 자신의 노스탤지어를 전염시키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한 번은 손전등에 관련된 고향 친구와의 일화를 영화를 매개하여 시각적으로 재현하려는 듯한 시도의 숏도 보이지만, 그 재현은 불완전한 형태에 그친다. 이처럼 과거에 끊어진 인연들은 현실에서 재회는커녕, 추억에 대한 열람조차 불가능한 영역처럼 그려진다. 심지어 그러한 추억들은 순간의 꿈이라는 허구의 영역을 매개해야지만 접근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천성이 꿈속에서만 어머니나 아내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던 것처럼.

이처럼 과거의 인연들이 돌이킬 수 없는 봉인을 건너가버렸다면, 현재 상실의 위기에 당면해 있는 연 또한 같은 운명에 처해있는 게 아닐까? 영화는 웨이웨이의 실종을 제시하여 그 불길한 예감을 구현시킨다. 이제 천성은 웨이웨이를 찾기 위한 전위안으로의 여정을 숙명적으로 앞두고 있는데, 그 여정은 노파 의사의 고향 친구를 찾기 위한 여로와도 겹쳐서 제시된다. 자신의 상실뿐만 아니라 남의 상실마저 함께 대리하여 해소시켜야 하는 과업에 처한 천성은 영화의 도입부에서 제시되었던, 의사임에도 앓아야 했던 그의 처지를 묘하게 연상시킨다.

여기까지 카일리에서의 사건들을 1부로 본다면, 이후 롱테이크로 표현되는 전경원으로의 여정은 2부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둘 사이에는 촬영 면에서 명확한 구분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둘 사이의 공통된 분모로서 1부(카일리)에서 제시된 소재들이 2부(전경원)에서 차용되기도 한다. 원시인에 대한 이야기나 팔꿈치에 막대를 묶은 광인처럼 단순 재현되는 이미지가 있는가 하면, 전혀 다른 맥락에 놓이면서 변용되는 이미지들도 존재한다. 일례로 2부의 오토바이는 1부에서 시동이 걸리지 않던 천성의 차와 사이드미러 하나가 떼인 천성의 오토바이 둘 모두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나, 둘과는 다르게 목적지로 천성을 적시에 옮겨다 놓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된다. 이처럼 1부와는 다른 맥락에서 재활용되는 여러 모티브들이 2부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소라 볼 수 있겠으며, 그중에서도 1부에서 그리움의 대상으로 표현되었던 여러 인물들의 속성들이 변용되는 지점이 단연 돋보인다.

앞서 1부에서는 상실을 앓는 이들에게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이 여럿 등장하는데, 이들마다 각각 두드러지는 특성들이 제시되고 2부에서는 그 특성들이 변주된다. 예를 들어 1부의 웨이웨이는 손목에 시계를 그릴 정도로 시계를 좋아하는데 이 점은 2부의 청년 웨이웨이에게서도 나타난다. 1부에서 천성이 자물쇠를 따는 것을 처음 보여주었던 게 웨이웨이였듯이, 2부에서도 천성은 청년 웨이웨이의 오토바이에 걸린 자물쇠를 따준다. 재밌는 점은 2부에서 청년 웨이웨이는 곧 카일리로 떠난다는 친구 양양과 연이 있다는 점에서 1부에서 노파 의사가 언급한 고향 친구와도 대응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혼재의 속성은 천성이 여자 이발사에게 하는 일화에서도 나타난다. 손목이 잘린 채 죽은 보스의 아들을 대신하여 원수를 응징한 이후 9년간 감옥에서 복역하였던 일화는 자연히 1부에서 천성 본인과 땡추의 아들과의 관계성을 연상시키는데, 2부에서는 그 보스의 아들이 생매장당하였다는 부연 설명이 추가된다. 이는 땡추의 아들에 노파 의사의 일화에서 생매장됐다던 아들에 대한 속성이 융합되어 2부에서 변용된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1부에서 구분되어 존재하던 개별 인물들의 특성들이 2부에서 기존 질서를 무시한 채 혼란스럽게 융합되고 재배열되었듯이, 1부에서 나타났던 인물들 사이의 관계성도 2부에서의 인물들과 대응되면서 완전히 전복된다. 노파 의사와 대응되는 양양은 고향 친구로 대응되는 청년 웨이웨이와 결별하는 대신, 강 건너편에서 재회한 이후 함께 다시 강을 건너 돌아온다. 천성이 청년 웨이웨이와 초장부터 만나는 점도 둘이 단절되었던 1부에서의 현실과 대조된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겠다. 그뿐만 아니라 1부에서 구현되지 못한 손전등 장면도, 천성이 가라오케에서 아내에게 미처 불러주지 못했던 노래도, 모두 2부에서 천성이 여자 이발사에게 대행하게 된다. 마치 1부에서 드러났던 거리감이 모두 봉합되고, 단절되었던 관계들이 다시 이어 붙는 듯하다.

그렇다면 영화의 1부와 2부는 왜 이토록 많은 공통점들과 차이점들을 동시에 가지도록 구성된 것일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앞에서 언급된 '시상'의 개념을 다시금 가져와야겠다. 천성은 여러 가지 이질적인 시상들을 나열하여 시를 쓰는 방식을 택하는데, 이는 2부를 구성하기 위해 1부의 여러 인물들에게 내재해있던 개별 속성들을 가져와 무질서하게 꿰맞춰야 했던 것과 방법론적으로 유사하다. 다만 2부의 롱테이크에서는 1부에서 단절되었던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일종의 완결된 재해석을 달성해냈다는 점에서, 천성의 시들과 결정적인 차이점을 가진다. 바로 2부의 롱테이크가 앞서 언급했던 천성이 완성하고자 했던 시가 되는 것이며, 그것은 1부의 현실을 재조립하여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였다는 점에서 꿈과 같은 속성을 지니는 대안적인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천성이 추구하였던 시의 완성이 영화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깊다. 앞서 TV에서의 시 낭송 이전에 '크레딧' 장면이 올라오고 실제적인 시는 부재하였듯이, 공백을 남기고 증발해버린 시는 영화와도 동일시된다. 또한 전경원으로의 여정을 야기하였다고 볼 수 있는, 웨이웨이와 조부가 만나는 장면에서도 영사기에서 영사되듯 벽에 기차가 지나가는 환상적인 이미지가 포개어진다. 이는 이후 천성의 전경원으로의 떠남을 암시하는 이미지임과 동시에 2부에서 나타날 롱테이크라는 '영화'에 대한 일종의 예고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영화'는 왜 롱테이크여야만 했을까? 앞서 1부의 여러 모티브들이 시상처럼 작용하여 2부의 롱테이크라는 '시'를 축조하였다고 말한 바 있는데, 애초에 시상은 하나의 원천에서 한꺼번에 얻어지지 않는다. 천성의 경우에도 시상의 역할을 했던 경험들이 과거 어머니와 아내와의 사별뿐만 아니라 현재의 웨이웨이를 비롯해 직간접적으로 접한 상실의 여러 에피소드들이었던 것처럼, 여러 시간대와 장소에 분산돼있던 시상들을 모아 하나의 완결된 구조로 이어붙이는 과정이 분명 필요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천성이 무의식적으로 꿈꾸었던 '시'의 기능이 단절되어 있던 관계들을 다시 연결시키는 데에 있었다면, 그 시상들을 롱테이크라는 형태로 이어붙여 하나의 연속된 시간대와 장소로 붙박아두는 것이 가장 최선의 설계가 아니었을까? 이를 위해서 천성은 수많은 컷들로 파편화된 1부의 잔해를 뒤적이면서 시상을 수렴해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모티브들을 재료 삼아 자의적으로 재배열하였던 2부가 꿈과 같은 속성을 지닌다고 앞서 말하였던 것처럼, 천성의 작품은 영속되지 못한다. 실제로 천성이 청년 웨이웨이의 이름을 듣고 이 모든 것이 꿈인지 의심하는 순간에, 40분간 힘겹게 지속되어왔던 롱테이크는 끊기면서 분절되어있는 현실의 숏들이 재개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숏들 속에서는 웨이웨이는 물론 노파 의사의 고향 친구와의 만남마저 좌절된다. 이 점 때문에 '카일리 블루스'는 그 형제 작이나 다름없는 '지구 최후의 밤'과 결정적인 차이점을 지니게 된다. 허구에서의 배회로 끝남으로써 확정적인 현실에의 결정을 유보하였던 '지구 최후의 밤'과는 다르게, '카일리 블루스'에서 천성이 무의식적인 바람으로 허구적으로 축조하였던 영화는 현실에 의해 꼬리가 잘리면서 이내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때 영화는 결말에서 하나의 희미한 희망을 제시한다.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천성은 청년 웨이웨이가 양양에게 보여주기로 약속했던 거꾸로 흘러가는 시계의 이미지를 보게 된다. 이는 지나가는 기차의 외벽에 영사되듯이 구현되는데, 그렇다면 그 이미지를 생산해 내는 허구의 영사기는 건너편 기차의 천성의 편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천성이 영사기를 쥐고 있는 한 다시금 상실의 시간들을 되돌려 그간의 단절을 수복할 여지는 존재하는 것이다. 천성은 반드시 언젠가는 웨이웨이와 재회하게 될 것이다. | 빌뇌비아